<이달의 판결> 재난참사와 관련된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책임과 기준을 세워왔는지를 살펴봅니다. 우리에게 법원의 판결문은 너무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판결을 시민의 눈높이에서 풀어 전하며, 재난피해자의 권리를 다시 묻고,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출발점이 되고자 합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늦더위가 이어진 지난 9월 19일, 국회 앞에서 코로나19 백신 부작용 희생자를 기리는 108번째 추모집회가 열렸습니다. 코로나19 백신 피해자 가족협의회(이하 피해가족협의회) 회원 20여 명은 길가에 설치된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묵념하고, 피해 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상황, 피해보상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등을 서로 나눴습니다.
도로 옆에 세워진 희생자의 영정사진 아래에는 나이와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회가 진행된 2시간 동안 누군가는 바닥에 떨어진 영정사진을 다시 받침대 위에 올려두었고, 바람에 휘청이는 천막 기둥을 테이프와 케이블 타이로 고정했습니다. 피해가족협의회는 햇수로 6년째 백신 부작용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적절한 보상 기준 마련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지난 9월 3일, 서울행정법원은 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한 A씨에 대한 예방접종 피해보상 소송에서 A씨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번 판결은 기저질환이 있는 사망자에 대해서도 ‘백신이 새로운 증상을 촉발하거나 기존의 증상을 악화시켰을’ 가능성을 고려해 피해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A씨가 사망한 이후 A씨 유족은 질병관리청에 예방접종 피해보상을 신청했으나 기각됐습니다. 당시 질병관리청은 ‘망인은 급성 독성 간염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예방접종과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A씨의 사망과 백신 접종 사이의 인과성을 추정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설령 망인에게 ‘사전에 진단되지 않은 기저 간질환’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종전에는 눈에 띄는 증상이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이 사건 예방접종을 받은 직후에 가려움증, 황달 같은 증상이 생기고 급성 간부전으로 급격히 악화되었으므로, 이 사건 예방접종이 기저질환과 결합하여 급성 간부전을 촉발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이 사건 예방접종과 망인의 급성 간부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할 수 있다.”
피해보상 인정 범위를 넓힌 판결
위 판결에는 2025년 대법원이 산업재해 사건에서 제시한 법리(법률을 해석·적용하는 데 기준이 되는 법적인 논리)가 바탕이 됐습니다.
‘질병 등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 등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서 질병 등을 촉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업무와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는 법리입니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피해자는 업무수행이 원인이 되어 질병이 발생했다는 점을 직접 증명해야 합니다. 법원은 피해자가 엄밀한 의학적 인과관계를 밝히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판단 기준을 형성해 왔습니다.
예방접종 피해보상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원은 의학적 인과성을 직접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대신, 접종 전후의 시간적 관계, 기존 질환의 유무, 다른 원인이 있었는지, 증상의 경과 등을 종합해 법적으로 책임을 인정할 만큼 충분한 관련성이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A씨 사건을 심리한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이상덕 부장판사)는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에도 백신과의 인과성이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을 짚으며 위 산업재해 법리를 인용했습니다.
재판부는 앞서 체육교사가 백신 접종 한 달 뒤 급성 간부전으로 사망한 사건, 대학교 4학년 학생이 백신 접종 12일 후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사망한 사건 등에서도 해당 법리를 인용해 피해자 유족 측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모두 기저질환이 있고, 백신과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질병관리청이 피해보상 신청을 기각한 사례였습니다.
올해 5월부터 9월 사이 선고된 이 판결들은 재판부가 인과성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산재 사건의 판단 기준을 적용해 백신 접종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A씨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우리누리 변창우 변호사는 “행정법원 1심 재판부 중 하나의 재판부가 판단 기준을 보다 완화하는 법리를 제시하였다 하여 그 기준이 전반적으로 실질적으로 완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2심에서 이 법리를 재차 수긍하는 판단을 내린다면 다른 피해보상 사건에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