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45년 만에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추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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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윤석열이 파면됐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선고 요지를 읽었다. 주문에 이르기 직전, 결론 부분에서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재현하여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고, 사회, 경제, 정치, 외교 전 분야에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라고 짚었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의 행위를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에 새로 포함했다. 이승만(1952년 비상계엄) – 박정희(1971년 국가비상사태, 1972·79년 비상계엄) – 전두환·노태우(1980년 비상계엄 전국확대) – 윤석열(2024년 비상계엄)로 이어지는 역사를 결정문에 담았다.

‘국가긴급권’에 관한 언급은 결정문 곳곳에 등장한다. 대통령의 국가긴급권이 어떤 권한이고, 헌법은 어떤 취지로 이를 인정하는지 명확히 설명했다. 윤석열은 지난 네 달간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헌법재판소 결론은 ‘만장일치 파면’이었다. 결정문과 지난 판례들을 통해, 헌재 판단의 자세한 근거와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살펴보자.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권한

대통령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발동할 권한을 가진다. ‘국가긴급권’이다. 87년 헌법이 정한 국가긴급권은 계엄선포권, 긴급재정경제명령·처분권, 긴급명령권 등이다.

국가긴급권이 필요한 이유는 전쟁 등 외환, 내란, 경제공황 같은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데 기존의 권력 행사 방식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즉 국가긴급권은 비상사태에서 헌법을 지키기 위한 ‘예외적’ 수단이므로, 대통령은 이를 아무 때나 마음대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했다. (출처: 헌법재판소)

현저히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인 판단

헌법재판소는 1994년부터 ‘국가긴급권을 행사할 때는 헌법적 한계를 특히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대통령이 국가긴급권을 발동할 수 있는 비상사태의 의미, 국가긴급권 발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목적 등을 명확히 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대통령의 판단이 현저히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이었는지 따졌다. 한 변호사가 당시 긴급재정명령으로 시행한 금융실명제에 반발해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재판부는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이었는지 여부를 검토한 뒤 “그렇게 인정되지 않는다”며 해당 청구를 기각했다.

이번 탄핵심판에서도 헌법재판소는 같은 기준을 따랐다. 비상사태의 의미와 비상계엄 목적 등에 대한 대통령 윤석열의 판단이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인지를 따졌다.

결론은 위헌·위법.

2024년 12월 3일 뉴스 화면. (출처: 연합뉴스)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

헌법이 정한 목적인 ‘위기상황 극복’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의적으로 국가긴급권을 행사했다면, 이는 당연히 권한 남용이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이전에 한국 사회가 겪어온 ‘남용’의 역사를 결정문에 담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전북·전남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의 해제를 기회로 공산잔비의 출몰이 빈번하여 후방 치안을 교란하고 민심을 소란케 하고 있는 바, 복잡다단한 현 시국은 최단기간 내에 후방 치안의 완전 확보를 절대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중략)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되었으니…” (국방부 장관 담화)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선포 이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비상사태에서 대통령이 ‘국가동원령’(인적·물적 자원, 토지 등)과 언론·출판에 ‘특별한 조치’를 내릴 수 있게 했다.

“국제 정세와 북괴의 동향을 면밀히 분석, 검토, 평가한 결과,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되어, 오늘 전 국민에게 이를 알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습니다. (중략) 침략자의 총칼을 ‘자유’와 ‘평화’의 구호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필요할 때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하고 이에 대처해 나아가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 특별담화)

박정희는 이어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다.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일대 개혁의 불가피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정치 현실을 직시할 때, 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같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한다면 혼란만 더욱 심해질뿐더러…” (대통령 특별선언)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것은 오로지 악랄한 선동과 폭력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일체의 경거망동과 불법 행위를 발본색원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특별담화)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하도록 강압했다.

“사회 혼란을 이용한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적화 책동이 날로 격중되고, 우리 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한 무장간첩의 계속적인 침투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중략) 이 같은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으며 (중략) 문자 그대로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특별성명)

신군부의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5일 해제됐다. 이제 시간은 40년을 훌쩍 건너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은, 끝난 줄 알았던 ‘국가긴급권 남용’의 역사를 되살린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대통령 대국민담화)



1990년대 이래, 사법부는 복수의 판결을 통해 박정희·전두환·윤석열의 목적이 ‘정치적’이었다고 평가해왔다. 이들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부마민주항쟁을 탄압하기 위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그리고 “국회와의 대립 상황을 타개할 의도로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국가긴급권을 남용했다.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했다. 지난 4일 나온 결정은 ‘12·3 비상계엄’에 대한 첫 번째 법적 평가다. 아직 ‘피고인’ 윤석열의 내란죄 형사재판이 남았다. 오는 4월 14일 시작한다. 코트워치는 내란죄 형사재판과 탄핵심판 결과의 연결고리에 대해 보도할 예정이다.

1951년 12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제2대 대선에서 연임을 노리던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11월 국회에 제출했으나, 이듬해 1월 부결됐다. (출처: e영상역사관 정부기록사진집)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5월 26일 통근버스에 탄 국회의원들을 군이 강제로 연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회에 대한 강압이 이어진 끝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됐고,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대선에서 다시 당선된다. (출처: 우리역사넷)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12월 6일 대변인을 통해 국가비상사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했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조항들은 “초헌법적 국가긴급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단을 받았다. (출처: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기존의 헌정 질서를 중단시키고, 유신 체제로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출처: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선포된 비상계엄은 이듬해 5월 17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서였다. 대법원은 신군부 내란죄 재판에서 “이들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년 5월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등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고 판단했다. (출처: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최윤정 기자 yoon@c-wat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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